1/30/2020
3월 22일(사순절 넷째 주일):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9:1-41
닐 프레사 목사

설교, 병원 침대 옆, 추모 예배, 성경 구절 액자 사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이번 주 시편 강해의 마지막 말씀이 이어집니다: "정녕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종신토록 거하리로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병원에 누워 기억이 희미해질 때 병문안을 가면 할머니가 주기도문과 함께 암송하시던 몇 안 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시편 23편이었고, "얼마나 크신 주"와 "놀라운 은혜"와 같은 찬송가 몇 곡도 함께 암송했습니다. 이 찬송가와 시편 23편과 같은 성경 구절들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사이의 삶을 어떻게든 목양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 지팡이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목자, 음침한 골짜기에 동행하시는 목자,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원수와 화해의 상을 차려주시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의 집에 거하므로 선과 자비가 평생의 동반자라는 것을 우리 존재의 모든 섬유질에 심어주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을 거꾸로 살면 어떨까요? 즉, 암송하고 노래하고 싶은 모든 진리와 현실을 머리맡에 두고 대신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를 업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목자 되신 주님을 평생 만나며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 디저트를 먼저 먹고 메인 코스를 먹듯이, 마지막에 기쁨을 주는 것부터 시작하고, 끝은 사실 삶의 시작이기에 끝을 바라보며 지금을 살아가십시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후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력에 대해 이야기하러 가자, 사람들은 믿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와 그의 간증, 그리고 치유하신 분을 무시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진짜 소경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치유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 맹인이었다면, 그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고, 태어날 때부터 쌓인 죄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너무 많아서 그의 치유에 구속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의심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눈이 멀어 눈앞에 계신 구세주의 실체를 보지 못했고, 자신의 고집과 강퍅한 마음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진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 맹인과의 만남의 가치를 놓쳤습니다. 그들은 특권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실제로 삶에 대해, 참된 삶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없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 고침에 대한 마음과 영혼과 환희를 간직한 한 사람의 간증조차 받을 수 없는 그들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짊어지신 구세주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목자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갈급했습니다.